친목계가 있는 날이면 인근 주민들에게 떡을 돌리거나, 점심때 초청하여 비빔밥이나 국수를 먹으면서 유사(有司) 날임을 알렸다. 동네 이웃들을 다 불러놓고 떠들썩하게 유사 날을 알리는 것은 탄광촌의 인심이기도 하겠거니와 사택의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곗날 유사를 맞은 집에서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춤추고, 노래하고, 떠들며 놀았다. 그래서 ‘이웃에 방해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라는 의미로 떡을 돌리거나 점심 제공으로 인사를 하는 것이다.

계는 공동체 생활을 보여주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전통생활 양식의 하나이다. 계는 계원들 사이의 친목을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이 있어 서로 유대관계를 돈독하게 한다. 탄광촌에 유독 많은 계가 성행하게 된 것은 고향을 떠나온 외지인으로 구성된 사회, 열악한 노동 환경이 빚은 죽음에 대한 공포, 마땅한 유흥거리가 없는 탄광촌의 문화적 배경 등에서 비롯되었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친목계에 겹쳐 들다 보니 일 년에 서너 번 이상은 유사가 되어 손님을 맞았다. 노래방이나 단란주점도 없었으니 계모임은 주로 유사를 맡은 집에서 이뤄졌다. 유사가 되면 아이들은 이웃집에 맡겨놓고 사택방에 계원들이 모여 복작복작 흥을 돋우었다.

석탄증산이 최고이던 1960∼1980년대의 광업소 공휴일은 한달에 한두 번이 전부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광업소 공휴일은 곗날이 되었다. 공휴일만 되면 사택마을마다 밤을 새워 떠들썩했다. 탄광촌 계모임이 밤샘문화가 된 데는 3교대 근무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공휴 뒷날 저녁 출근인 을방이나 밤 출근인 병방 노동장의 경우 밤새워 놀아도 다음날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사를 맡은 집의 옆집이나 앞뒷집에서는 커다란 전축 소리와 시끄럽게 떠들며 노는 소리를 생생하게 다 들어야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짜증을 내거나 탓하는 사람 없이 모두 잘 참았다. 요즘이야 어른들 술잔치는 고사하고 아파트 위층에서 어린아이들이 조금만 뛰어놀아도 쫓아 올라가 항의하거나 신고하는 세태가 아닌가. 다세대주택에서는 어린애가 많은 가족은 시끄럽다며 입주도 받아주지 않는 실정 아닌가. 이웃사촌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사라지는 세태를 보면 탄광촌 사택의 인정이 더 그리워진다.

곗날 유사 때는 마이크가 달린 전축이 최고의 인기였다. 전축을 힘차게 틀어놓고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것이 곗날의 풍경이었다. 전축이 없는 집에서는 이웃집의 전축을 빌려왔다. 1970년대에는 승용차도 없던 시절이니 손수레로 전축을 실어 날랐다. 값비싼 전축이 손수레에 실려 옮겨지는 모습 또한 진풍경이었다.

사택에서 전축이 유행한 데는 낮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려는 3교대 근무자들의 놀이문화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탄광촌 주민들은 노래와 춤을 누구보다도 즐겼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원만한 부부관계를 위한 처방으로 전축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무판자나 블록으로 벽이 만들어진 탄광사택은 방음이 취약해서 늘 옆집이 마음에 쓰였다. 방음이 안 되는 사택생활을 어색해하던 신혼부부들이 먼저 전축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낮에 휴식을 취하고 밤에 출근하는 병방 근무자는 전축을 크게 틀어놓고서야 아내와 은밀한 사랑을 즐길 수 있었다. 낮에는 텔레비전도 안 나오던 시절이니 전축이야말로 소음을 통해 완벽한 방음 역할을 한 셈이다.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을 살 형편까지는 못 된다 해도 전축만큼은 너도나도 사들였다. 1970～1980년대 태백탄광촌의 한 전축 대리점 판매량이 몇 달간 연속으로 전국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당시 가전업계에서는 집집이 전축을 장만하는 것을 보고 탄광촌의 경기가 좋다면서 놀랐다. 그런데 실은 다른 지역에서는 알 수 없는 사택 생활만의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3교대 근무자들의 낮 생활 보장용이라는 사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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