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최면

태백시 장성지역은 도시 전체가 장성광업소라는 단일 회사에 의해 형성된 지역이다. 장성지역 사회는 장성광업소 노동자 6천 명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 장성광업소 노동자와 가족들은 같은 음악, 같은 뉴스, 같은 방송을 들으면서 생활했다. 장성광업소가 사택 단위별로 설치해 놓은 스피커를 통해 아침 출근 시간과 점심때, 퇴근시간마다 음악과 라디오뉴스를 들었다. 그리고 광업소나 국가에서 알리는 공지사항을 들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식민지 공간에서는 사이렌 소리를 통해 공장의 ‘시간―기계’가 마을 전체에 영향을 미치며 출근을 통제한 적이 있다. 평안남도 강동군에 있는 대규모의 시멘트 공업지역인 승호리가 그랬다.

이곳에는 강동군의 석탄을 개발하기 위해 1909년 9월에 이미 대동강-승호리 간의 평양 탄광선(平壤炭鑛線, 23.3㎞)이 운행되던 지역이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던 승호리는 고노다(小野田)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면서 마을 전체가 하나의 공장이 된다. 다음은 그에 대한 설명이다.

고노다 공장은 노동자의 출퇴근 시간이 공장 내부가 아닌 마을 전체의 차원에서 통제되었다. 조그마한 농촌 마을에 위치한 근대적 공장인 고노다 시멘트 공장은 설립과 동시에 그 마을의 중심으로 기능하게 된다. 하루에 두 번 마을 전역에서 들을 번 마을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이것이 출퇴근 시간을 표시하였다.(중략)

고노다 승호리 공장의 경우에는 인근 마을에서 출퇴근하는 남성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의 삶 전체가 고노다 공장과 연계되어 있는 ‘공장 마을’로서의 특성을 보인다.(중략)

승호리라는 이름없는 작은 마을은 고노다 공장의 팽창과 함께 변모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학교가 들어서고,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고노다 공장은 승호리 마을의 중심이며, 그 자체가 마을을 지배하는 작은 정부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장 안에서 전부 직접적인 통제를 하지 않더라도, 마을과의 연계 속에서 대부분 통제가 가능한 체계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장을 벗어난 마을 전체가 공장 내부인 것이다.(강이수,「식민지하 근대적 공장과 노동규율」,『상지대 논문집』18집, 상지대, 1997, pp.119∼130.)

평남 강동군 승호리와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 지역은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장성지역 역시 장성광업소라는 한 개의 탄광을 통해 삼척군 장성읍을 거쳐 태백시 장성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같은 음악과 같은 뉴스를 들으면서 오랜 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 마음도 닮아갔다. 통일성을 가진 집단체제는 진리를 가리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하지만, 공통의 목적을 향해 달리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셈이다.

한때 언론을 통해 국민을 길들이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언론들은 스포츠, 선거, 정부의 담화문 발표, 세계 각국의 대규모 전쟁이나 대형사고 때마다 같은 내용을 보도하곤 한다. 개개인의 관심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계를 하나의 관점으로 만들어낸다.

이런 홍보의 통일성은 민족주의나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길들인다. 1970년대 후반까지 존재하던 태극기 하강식이 그 하나의 예이다.

저물녘에 길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들으면서 길 가던 행인들은 모두 제자리에 서야 했다. 심지어는 도로의 차들까지 멈추어 서기도 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국기를 향해, 서로 제 각각의 방향으로 서서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국기에 대한 경례는 애국심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공포를 심어줬다.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문명인에 비해서 미개인은 개인적인 성향이 적고, 사회에 의해서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진다고 인류학자들은 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이야기는 집단체제에 묶여 살아온 우리 사회가 얼마나 미개했던가를 확인시켜 준다.

세상은 많이 밝아졌다. 독재타도가 오랜 구호이던 나라에 노벨 평화상을 탄 대통령까지 나왔다. 정부를 비판해도 붙잡혀 가지 않고, 심지어 공산국가인 북한에까지 관광여행을 가는 세상이다. 그만큼 자유가 있고 인권이 있는 나라에 사는 셈인데 어쩐지 아직도 길을 가다 만나는 경찰 제복이 편안하지 않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의 ‘순사’가, 그￢그만1980년대의 독재와 계엄의 공포가 제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길들였을 것이다. 머리가 길다고 해서, 청바지를 입었다고 해서, 문신을 새겼다고 해서, 쳐다보며 웃었다고 해서…

그런 하찮은 이유로 곤봉에 얻어맞거나 파출소에 끌려가 무릎 꿇엠다고생하던 이들이 많았다. 그런 시절에 비하면 얼마나 좋아진 세상인가. 그런데도 그 제복이 두려운 것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제복의 유사성이 주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너는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

지나간 시간은 모든 것이 아쉽다. ‘너는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하면서 손가락을 내밀던 한복 입은 할아버지, 단군을 닮은 그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장성광업소 정문 옆, 그러니까 장성시내 방향·화광동 방향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의 대형 입간판으로 서서 지켜보던 그 할아버지는 누구였을까? 할아버지 그림 아래 커다란 글씨 ‘너는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말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던 할아버지. 1970년대 후반까지 태백탄광촌 곳곳에 서 있던 대형 입간판은 맹목적 애국을 강요하고 있었다.

어느날 책을 읽던 중 그 할아버지를 또다시 떠올렸다. 차문석의 『반노동의 유토피아』(박종철출판사, 2001) 219쪽에 나온 한 장의 그림을 보면서였다. 소련이 1930년대 노동영웅인 스타하노프의 모습을 등장시켜 ‘스탈린주의적인 혁명적 노르마’를 달성할 것을 호소하는 신문 포스터였다.

‘너는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하고 손가락을 내밀던 그 포스터를 볼 때와 똑같은 전율을 느꼈다. 소련에서는 1936년을 스타하노프의 해로 정하여 생산 경쟁 운동을 전개했다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그 할아버지의 손가락은 무엇을 의미했던 것일까? 그러한 포스터가 태백탄광촌 말고 다른 도시에도 있었던 것일까?

국민을 맹목적으로 몰고 가면서 규율의 질서를 잡아가는 것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똑같은 방식이었다.

탄광촌 지역에 유독 멸공이나 반공의 구호가 많았던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국가는 그것을 통해 어떤 이득을 취했던 것일까? 늘 국가와 정보기관에서는 탄광촌에 간첩이 살고 있으며, 자유대한을 붕괴하려는 불순분자가 많다고 선동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 탄광촌 주민과 광부들은 얼마나 많은 억압을 받아야 했던가! 탄광노동운동조차 자유대한의 붕괴이니, 북한 간첩의 사주이니 하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하지 않았던가.

오직 가난 때문에 오기 싫은 탄광촌, 그 막장을 선택한 순박한 사람들을 툭하면 공산주의니 조국애니 하는 것으로 옭아맸다. 광부들은 불순분자로 몰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했고, 당연한 요구인 노동인권의 침해에 대해서도 항변조차 못하고 살아왔다. 한국의 빠른 산업화는 탄광촌의 집단체제 형성과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 공포로 길들여진 광부가 석탄생산에만 몰두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