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가루 묻은 광부의 얼굴을 시내에서 만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광부들은 석탄이 덕지덕지 묻은 작업복, 시커먼 땀에 전 속옷, 죽탄 가득한 장화, 새까만 얼굴에 이와 눈동자만 하얗게 반짝이며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하루 세 번씩 퇴근 시간마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광업소의 목욕탕은 사택 가까운 마을에 있었다. 광부들은 퇴근 후 마을 목욕탕으로 가기까지 검은 몸뚱이로 시내를 활보했다.

모두가 새카맣게 똑같았으니 가족이 지나쳐도 알아보지 못했다. 광부들은 갈아입을 옷을 가져가려고 목욕탕에 앞서 집부터 들렸으므로 가족들은 씻지 않은 검은 얼굴을 보았다. 다음은 탄광촌에 살던 한 주부의 회고담이다.

새까만 모습으로 가족 앞에 서야 했던 광부들의 신세도 처량했거니와 그걸 보는 가족의 마음은 더 찢어질 것 같았다. 온몸이 탄가루 범벅인 광부들은 “퇴근 후 씻고 잤는데도 그다음 날 거울을 보니 사람 얼굴이 아니더라”라고 말했다.

탄광촌에서는 그렇게 검은색에 익숙해져 갔다. 어린이들이 개울이나 산을 검은색으로 그렸다거나 아빠의 얼굴을 까맣게 그려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일화들이 생겨났다.

검은 탄광촌의 일상생활을 바꾼 것은 중앙목욕탕의 설립이다. 1970년대 말부터 사택 단위의 목욕탕을 대신하여 중앙목욕탕이라 불리는 큰 목욕탕이 광업소 안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광업소 현장에서 옷을 갈아입고 씻을 수 있었으므로 검은 얼굴로 가족 앞에 서지 않아도 됐다.

중앙목욕탕이 문을 열던 날 탄광촌 전체가 떠들썩했다. 그래서 어느 광업소에 중앙목욕탕이 생겼다 하면 언론에 크게 보도될 만큼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장성광업소 중앙목욕탕은 수백 명이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동양 최대 규모의 목욕탕이라 하여 9시 뉴스에 보도된 적도 있다.

광업소 내에 중앙목욕탕이 생기면서 검은 얼굴로 마을을 다니던 광부들이 사라졌다. 가족들에게 가장의 새카만 얼굴, 지하 막장의 비참한 증거물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광부와 가족 모두가 반겼다.

깨끗한 옷으로 출퇴근하면서 노동의 자부심마저 생겨났다. 광업소의 중앙목욕탕 설립은 가히 광부복지의 혁명이라 하겠다.

중앙목욕탕이 광부들을 위한 복지 혁명이라면, 중앙목욕탕 안에 설치된 중앙세탁소는 광부의 아내를 위한 복지혁명이다. 중앙세탁소는 대형세탁기를 들여놓고 무료로 광부들의 작업복을 세탁했다.

당시 광부들은 새까만 모습으로 집에 와서는 갈아입을 옷을 보자기에 싸들고 마을 목욕탕으로 갔다. 목욕 후 옷을 갈아입고 나서는 작업복을 보자기에 싸서 집으로 가져왔다. 땀과 탄가루에 뒤범벅인 작업복은 매일 갈아입어야 했으므로 중앙세탁소가 생기기 전까지 작업복을 빠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광부의 아내는 1년 내내 작업복을 들고 냇가나 공동우물로 나가 빨래를 했다.

공동우물에서 광부의 작업복을 빨래할 때는 바구니를 들고 네 단계를 거쳐야 한다. 제일 끝의 더러운 물에서 초벌 헹구기를 하고, 그다음 자리를 옮겨 비벼서 빤다. 그런 다음 윗 자리로 옮겨 비누빨래를 한다.

마지막 헹구기를 할 때서야 제일 앞자리로 다시 옮긴다. 광부의 작업복 빨래를 한번 하려면 바구니를 들고 네 단계를 거쳐야 했다.

개인수도가 없던 시절이니 광부의 아내는 계곡이나 개울을 찾아가 빨래를 하곤 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사택단위별로 모여서 간식을 준비하고서 어린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섰다. 빨래바구니에는 집집이 준비한 김밥, 옥수수, 감자, 고구마, 부침개 등을 담아 소풍 가듯 간다. 끝난 빨래는 양지바른 쪽 돌 위에 얹어놓고 간식을 먹으면서 세상사는 얘기로 한나절을 보냈다.

광업소의 중앙세탁소에서 작업복을 대신 빨아주면서 검은 냇물에서 빨래하는 풍경도 사라졌다. 광부 아내들은 매일 작업복을 빨던 가사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막장에 들어가지 않고도 손톱이 까맣던 광부의 아내는 작업복 빨래가 사라지면서 고운 색을 되찾았다.

중앙목욕탕과 중앙세탁소가 설립되고 나서 검은 광부의 얼굴과 검은 냇물에서 빨래하던 광부 아내가 사라졌다. 검은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하던 광부들이 일상복을 입고 출퇴근하면서 검은색 일색의 탄광촌 풍경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탄가루에 새까매진 얼굴을 가족이나 이웃에게 보이지 않아도 되었으니 광부 노동에 대한 이미지를 높여주었다. 또 광부 아내들이 매일 시달려야 했던 힘겨운 작업복 빨래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중앙목욕탕과 중앙세탁소의 건립은 광부와 광부 아내의 복지뿐만 아니라 탄광촌 생활상을 한 차원 높이는 전환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