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사북사태 이후 정부에서는 광부들의 처우 개선에 관심을 뒀다. 광부 복지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탄광마다 새마을과를 신설했으며, 목장을 운영하는 광업소가 생겨났다. 광업소가 나서서 주부들의 부업을 장려했으며, 사택의 정비에도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건강식을 위한 돼지를 보급하기로 하고 노동자 수에 비례하여 살아있는 돼지를 탄광에 보급했다. 태백시 화전동의 어룡광업소에서는 정부로부터 새끼돼지 150두를 받아 길렀는데, 나중에 새끼를 낳아 300여 두로 늘어났다. 사육의 전문화가 요구되면서 광업소 새마을과가 나서서 아예 목장까지 만들었다.

탄광 목장에서 기른 돼지는 계절별로 광업소 휴일에 맞춰 노동자들에게 지급됐다. 소속 갱 단위로 산 돼지가 배급되면 광부들은 끈으로 묶어 계곡으로 갔다. 돼지 잡는 날은 광부뿐 아니라 가족까지 함께 모여 시끌벅적한 잔치가 벌어졌다. 당시 야유회 장소 중에는 절골이나 하장 계곡이 인기가 있었고, 광부 중에는 돼지 잘 잡고 요리 잘하는 사람이거나 노래 잘하는 사람이 인기를 누렸다.

1980년대 들어 명절 선물로 식용유, 세숫비누 세트도 등장했다. 매일 빨랫비누로 목욕하던 광부들은 세숫비누 세트를 좋아했다. 빨랫비누를 쓸 때는 퇴근차량이 비릿한 냄새로 진동했는데, 명절에 세숫비누가 지급되고 나면 근 한 달 동안 퇴근버스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통근 버스 안을 가득 메운 향기에 취해 버스에 올라타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오늘은 여자 냄새가 나는 군, 거 기분 좋은데!” 당시 광부들을 싱글벙글하게 한 단골 주인공은 다이알 비누세트였다

.
현금 보너스 대신 식품으로 보너스를 지급하던 시절의 이야기는 가난한 시대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일 년에 한두 번 보너스 전표를 받아 돼지고기를 먹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쇠고기가 태백탄광촌의 특산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시대가 이처럼 빨리 올 줄은 그때만 해도 몰랐다.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던 그 시절, 탄광촌 사람들은 돼지고기 한 점에도 행복을 느꼈다. 건강식이 귀하던 때 광업소가 나서서 광부들의 식생활까지 챙겨주었으니 아름다운 탄광촌 풍속 아닌가!

청와대표 방한복 입는 특권층

1980년대 중반 무렵 광부들은 가슴 안쪽에 ‘대통령 하사품’이라는 명찰을 크게 붙인 방한복을 받았다. 유독 추운 탄광촌의 겨울을 나야 하는 광부들에게 하사품 방한복은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1985년 태백시 인구 11만 명 중 광부가 2만여 명이었으니 거리마다 똑같은 방한복 물결이었다. 또 하사품 내복이 지급되는 해에는 목욕탕에서 같은 내복 동지들을 만났다. 모르는 사이라도 내복을 벗다 말고 상대방의 속옷을 바라보면서 멋쩍은 웃음을 한바탕 교환하곤 했다. 아마 겉옷과 속옷까지 같은 유니폼을 입는 사람들은 광부들밖에 없었지 않나 싶다.

19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 때는 방한복에 ‘대통령 각하 하사품’이라고 적혀 있었다. 5공화국 말기 들어 ‘각하’라는 호칭이 권위적인 표현인데다 대통령과 각하를 함께 쓰는 것은 이중 존칭이라는 논의가 나왔다. ‘보통사람 시대’를 선언한 6공 노태우 정권 때는 ‘대통령 하사품’으로 고쳤다. 하사품이 아니라 ‘대통령 선물’ 혹은 ‘대통령 드림’ 쯤으로 고치지 못한 걸 보면 권위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대통령 하사품이란 문구는 권위적인 풍조를 보여주는 이정표인 셈이다.

오리털 파카가 큰 인기를 끌던 당시, 청와대가 지급하는 방한복은 품질 면에서 오리털 파카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산간 협곡으로 형성된 태백 탄광촌 주민들은 겨울만 되면 여느 도시보다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던 터였기에 청와대에서 나눠준 방한복은 참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변변한 외투도 없던 광부들은 하사품을 유니폼처럼 입고 출퇴근했으며, 어떤 이들은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옷을 신청할 때 아들 치수에 맞춰 주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통령 하사품 방한복에는 모자가 달렸으므로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을 나기에는 최고였다. 단체복일 경우 대체로 품질이나 외관미가 떨어져 외출용에는 꺼리는 게 상례였으나, 청와대표 방한복만큼은 ‘대통령 각하 하사품’답게 품질이나 외관상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서울·부산 등지의 장거리 외출 때도 방한복을 입고 나섰다.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 때문에 ‘대통령 각하 하사품’이란 글귀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그 반감의 표시로 옷을 받자마자 ‘대통령 각하 하사품’이란 표식부터 떼어내고 입었다.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품은 사람조차 옷만큼은 미워하지 않은 셈이다.

창피하다면서 대통령 하사품 표식을 뗀 경우와 달리 외지로 갈 때 입고 가서 친지들에게 자랑한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도 청와대 다녀와서 대통령 봉황 마크가 찍힌 시계나 기념품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당시로선 대통령에게 하사품 옷을 받는 것만으로도 특권층으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