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귀한데다 쌀은 비쌌으므로 광부들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석탄공사 장성광업소나 도계광업소는 급여를 현금으로 지급하면서, 쌀 문제까지 함께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980년대 장성광업소 노조지부장 선거에서 질 좋고 저렴한 쌀 배급 공약이 나왔으며, 당선자는 탄광의 예산으로 직접 쌀 구매에 나서는 실천에 들어갔다. 광업소가 쌀집을 경영하듯 한 달에 한차례씩 값싸고 품질 좋은 쌀을 공급하면서 광부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장성지역은 현재 장성소방서 옆 태백중·고동문회관 자리가, 철암지역은 현 철암건널목 앞 철암생산부 사무실 옆(현 주차장 부지) 자리가 석공쌀 배급소 터였다. 배급 날이 되면 배급소에는 쌀을 타려는 광부 가족들로 온종일 긴 줄이 늘어서면서 큰 장터를 연상케 했다.

당시에는 여성들의 일자리가 귀했으므로 맞벌이 부부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쌀 배급은 주로 주부들 담당이었다. 쌀 배급 날이면 쌀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지고, 손수레에 끌고 오는 등 쌀 나르는 물결로 넘쳤다. 쌀 배급 30kg이 넘는 집에서는 쌀 배달부를 고용하기도 했다. 쌀 배달부 중에는 배급날 만 기다렸다가 그 일을 하곤 했다. 그것만으로도 자식을 서울지역의 대학을 보낼 만큼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석공 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의 쌀은 유별나게 인기가 있어서 돈이 많다고 해도 원하는 만큼 다 살 수는 없었다. 희망하는 사람이 많자 회사에서는 가족 수에 따라 일정량의 배급으로 제한했다. 배급 쌀은 품질이 좋은데다 값이 싸서, 돈이 필요한 경우 쌀집에 되팔아도 이윤이 남았다. 석공 쌀이 품질 좋고 값이 싼 이유는 광업소 측이 직원 6천 명 분이라는 대량의 쌀을 입찰로 싸게 사는 데다, 운송이나 배급 등의 부대비용을 회사 후생계의 인력과 예산으로 하기 때문이다.

쌀이 남는 광부들은 이웃집을 위해 쌀 전표를 끊어주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이웃은 값싸게 쌀을 구할 수 있어 고맙다면서 막걸리 한 통이나 두부 몇 모 등으로 답례했다. 이런 일은 나중에 광업소가 나서서 월급봉투 뒷면의 가정통신란을 통해 경고문을 발송하여 제지할 만큼 일반화되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일부 종업원과 가족들은 배급전표 및 양곡을 상인 또는 일반가정에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본인에게 피해를 줄뿐 아니라 시중 상거래를 문란케 하는 행위가 되고 있습니다. 판매행위 시 적발되면 사규에 의거 문책을 받게 되며 양곡배급도 중지됩니다.(‘배급전표 및 양곡 판매행위를 하지 맙시다’중에서)

장성광업소나 도계광업소는 쌀 배급이 광부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었지만, 월급 대신 쌀을 주는 영세 광업소에는 쌀 배급이 원성만 샀다. 회사로서는 월급을 지급할 돈이 없으니 비싼 외상 쌀을 사다가 급여를 대신하고 있었다. 결국, 모든 손해는 광부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석공쌀처럼 큰 광업소 쌀은 값싸고 질이 좋았으므로 서로 사려고 했지만, 민영광업소 쌀은 광산미라 부르며 기피했다. 영세 광업소에서는 싼값의 쌀만 구입했기 때문에 품질 낮은 쌀을 들여왔다. 봉화·영주·안동·영천 등지의 쌀 생산지에서는 광업소가 구입하는 싸구려 쌀을 광산미라고 불렀다. 광산미라는 명칭은 탄광촌에서 생겨난 게 아니라 쌀 생산지에서 붙인 부끄러운 이름이다.

영세 탄광에서 쌀을 값싸게 구매하려는 이유는 이윤 때문이다. 월급 대용으로 쌀을 배급하는 처지이니 싸구려 쌀을 비싼 시중가로 계산하면 급여를 적게 주는 효과를 보는 것이다. 영세 탄광 업주들은 광산미조차도 싸게 살 수 없었다. 탄광에서는 현금이 없으니 쌀 도매처와 5～6개월 외상으로 어음 결제를 하기 때문이다. 쌀 도매상들은 5～6개월 기간에 해당하는 이자까지 계산해 쌀값에 얹으니 비싼 쌀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쌀을 구매하러 간 탄광 관리자들의 중간 착복도 쌀값을 올리는 요인이 되었다. 광산미는 생산지의 가장 나쁜 쌀이 비싼 값으로 둔갑하여 들어와 배급됐다.

광부들은 광산미란 것을 알면서도 월급 대용으로 나오는 것이어서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도 없으면 가족들 굶기 십상이었다. 때로 돈이 급한 사람은 광산미를 되팔기도 하는데 구매 가격보다 낮았으니 생활은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겪는다. 광산미는 1980년대 중반까지 악명을 떨쳤다.

인기 높던 석공쌀 배급도 1990년대 말부터는 폐지됐다. 경제 성장과 더불어 외식이 늘어나는 데다 핵가족화로 쌀 소비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광업소의 쌀 배급이 사라지면서 탄광촌 시내에는 쌀 점포가 늘어났다. 그 대신 배급날이 없어졌으므로 쌀을 대신 날라주며 생계를 잇던 배달꾼들의 밥줄이 끊어졌다. 쌀 배급 풍속 변화에 따라 탄광촌 주민들의 생활 양상도 변해갔다. 탄광촌의 생활상은 광부들의 삶이나, 광업소의 정책에 의해 좌우되었다. 

광부들은 석탄과 쌀을 맞바꾸면서 살아왔다. 석공쌀과 광산미에 담긴 이야기는 쌀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광부들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배급 쌀을 보리쌀이나 밀가루로 바꾸면서까지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던 광부의 아내도 있었다. 탄광촌에는 절망적 경제 상황 속에서도 쌀을 되팔면서까지 바닥의 삶을 견디던 광부와 그의 가족들이 있었다. 그러고보면 탄광은 절망의 땅이 아니다. 광부와 그의 아내는 광산미를 가지고도 희망의 쌀밥을 지으며 살아가던 땅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