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업소 공휴일은 부녀자 목욕하는 날
1970년대 중반만 해도 가옥 구조라고는 5～7평 남짓했다. 광업소가 보급하는 사택도 실정은 마찬가지였다. 방 한 칸이거나 두 칸짜리의 좁은 집에서 3대가 살아가는 게 예사였다. 당시 세수하는 장소는 부엌으로, 그나마도 비좁은 형편이니 집에서 목욕하기란 어려운 실정이었다. 어쩌다 집 안에서 목욕이라도 할라치면 무슨 큰 잔치라도 하듯 떠들썩했다. 목욕날이 정해지면 가마솥에 물을 펄펄 끓여놓고 온 식구가 돌아가면서 목욕을 했다.

아침에 세수할 때 보면 좁은 부엌을 피해 집 밖으로 세숫대야를 들고 나왔다. 골목에서 세숫대야를 든 채 서로 마주 보면서 아침 인사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다. 눈곱이 달리고, 봉두난발 머리로 이웃끼리 인사하면서 탄광촌의 아침은 시작되었다.

마을에는 대중목욕탕이 없고 집안에는 샤워시설이 없던 1960～1970년대의 탄광촌 계곡은 여름이면 대중탕으로 변신한다. 명절 앞두고 목욕하는 것이 전부이던 시절이니, 여름철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계곡이나 개울을 찾아 1년 치의 때를 벗겼다. 태백탄광촌 아이들은 황지천·장성천·철암천에서 물놀이를 했다. 당시 40개 이상의 탄광이 운영되고 있었으니 냇물이 새카맣게 물들어가던 무렵이다. 검은 하천에서 물놀이를 한참 하다가 밖에 나온 뒤 몸이 마를 무렵이면, 몸에서 뭔가가 밀려나왔다. 냇물의 검은 때가 몸에 붙은 것인데, 속옷으로 툭툭 털어내면 쉽게 떨어져 나갔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탄광촌에는 사설 목욕탕이 귀했다. 태백시 장성지역만 두고 보더라도 목욕탕을 구경할 수 없었다. 6천 명의 탄광노동자를 거느린 장성광업소 하나로 장성읍이라는 도시가 형성되다 보니 지역 사회 전반이 광업소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광업소는 계산동, 하신흥동, 문곡, 금천, 화광동, 공화동, 협심동, 평화동 등 사택 단위별로 목욕탕을 지어놓고 있었다. 이용은 무료였으니 사설 목욕탕은 생겨날 필요조차 못 느꼈던 셈이다.

광부들뿐 아니라 장성지역 모든 남자는 집 가까운 광업소 목욕탕을 이용했다. 목욕탕이라야 데워진 물을 가둔 커다란 탕을 가진 게 전부였다. 탕 안에는 들어갈 수 없고, 그 주변에 둘러앉아 물을 퍼내 사용하는 것이다. 1970년대 말 들어 장성광업소 내에 중앙목욕탕이라는 대형 목욕탕이 설치되기 전까지 사택에 있던 목욕탕이 공중목욕탕 구실을 했다.

목욕탕 시설이 없으니 탄광촌 주민들은 여름이 아닌 철에는 주로 광업소 목욕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주민들은 광부들이 목욕하고 남는 물을 썼다. 그것도 목욕물이 충분히 남아 있을 때나 가능했으니 매일 이용하지는 못했다. 앞에서 물을 많이 퍼내 쓰면 늦게 퇴근한 광부들조차 씻지 못할 정도였으니.
남자들은 광부들의 목욕탕 이용이 쉬웠지만, 부녀자들은 상황이 달랐다. 그러다 보니 탄광촌 부녀자들의 목욕과 얽힌 재미난 일들이 많았다. 압축기실 목욕탕의 일화도 그렇게 생겨났다.

압축기는 탄광 막장으로 공기를 불어넣는 기계인데, 기계마다 장치된 냉각수에서는 더운물이 넘쳐흘렀다. 광업소 압축기실은 늘 인근 주민들의 목욕탕 역할을 하곤 했다. 압축기실에서 목욕할 물을 준다고 동네로 연락하면 부녀자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그때 일부 짓궂은 남자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압축기실 바깥에 매미처럼 붙어 서서 목욕장면을 훔쳐보았다. 나중엔 남자들이 훔쳐본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탄광촌 부녀자들은 소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욕물만 준다면 또다시 한걸음에 달려가곤 했다.

압축기실 말고도 부녀자들에게 인기 있던 곳은 장성병원(현 태백중앙병원) 보일러실의 작은 목욕탕이다. 공중목욕탕이 없다 보니 어느 목욕탕이 문을 열어준다 하면, 이 동네 저 동네 부녀자들이 목욕도구를 들고 우르르 몰려가곤 했다.

장성광업소는 공휴가 날 때면 부녀자들을 위해 사택 단위로 있는 광업소 목욕탕을 개방했다. 생산량에 쫓기던 시절이라 공휴일이라곤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이 전부였다. 탄광촌 부녀자들은 손꼽아 기다렸다가 광업소 공휴만 나면 목욕탕부터 달려갔다. 장성광업소 공휴일은 장성탄광촌 부녀자들이 목욕하는 날이었다.

목욕 사정이 이쯤 되다보니 목욕탕 관리인이나 보일러실 기사의 끗발이 좋았다.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목욕탕 관계자의 아들은 그 덕분에 여학생들로부터 꽤 인기를 누렸다. 아버지가 장거리 외출이라도 나서면 목욕탕 관리를 맡을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이면 동네 여자 친구들을 불러 목욕하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자정을 지나 퇴근하는 을방 작업 광부들의 목욕이 끝나는 새벽 1시30여 분 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시각까지 기다리고자 남학생 집에는 여자 친구들이 모여들어 민화투, 뻥 화투, 끝말잇기, 묵찌빠 등의 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남자 친구가 아버지 대신 목욕탕 봐 주는 날은 여자 친구들 목욕하는 날이었던 셈이다.

짓궂은 남자친구들은 문틈으로 여자 친구들 목욕을 엿보기도 했는데, 그런 소문이라도 퍼지면 여학생들은 다른 동네로 옮겨갔다. 당시 광업소 목욕탕 외벽은 나무판자로 지어졌으므로 틈새가 많았다. 길을 가다 보면 안에서 목욕하는 소리가 바깥에까지 생생하게 들릴 정도였으니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 판자벽에 눈을 바싹 들이대면 내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짓궂은 일은 여학생뿐만 아니라 성인 여자들이 목욕할 때도 벌어졌는데, 관리인들은 그걸 지키느라 목욕탕 주변을 순찰하기도 했다. 남자들이 엿본다는 소문이 나돌면 한동안은 그 목욕탕에 여자들 발길이 끊어졌다.

장성지역의 학교 동창회가 열리면 지금도 목욕탕 얘기가 화제로 떠오른다. 목욕탕 관리인의 아들과 어울렸던 여자동창생들은 “그때 지켜준다 하고선 못 볼 것까지 다 본 사이여선지 남자동창생들이 지금까지도 허물없는 친구로 남아있다.”면서 까르르 웃는다. 한 남자동창이 “그때 잘 봤다.”하고 농담을 던지면 여자동창은 “너 그때 정말 내 것 봤니?”하고 진지하게 물어본다. 그러면 남자동창은 이내 정색을 하면서 “아니다, 우린 절대 안 봤다.” 하면서 킬킬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