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 일어나서 남편 목욕탕 따라가기
광부의 아내들은 광업소 목욕탕 이용이 쉬운 편이다. 1970년대 중반 들어 장성지역에도 사설목욕탕이 생겼지만, 광부의 아내들은 1970년대 말까지도 광업소 목욕탕을 더 자주 이용했다.

을방 작업 다녀온 남편은 “오늘 물 좋더라, 목욕탕 가자!” 또는 “오늘 물 깨끗하니 가자!”라며 아내에게 목욕을 권했다. 을방 광부가 탕에서 퍼내 쓰고 남은 물로 목욕하는 것이니, 목욕할 만큼 남아있거나 깨끗해야만 아내에게 권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을방 작업자 중에서도 끝 무렵에 목욕한 경우에나 알 수 있으니 자주 있는 기회는 아니다.

남편이 목욕을 끝내고 온 시점은 대체로 새벽 1시 30분경이다. 한잠 자다가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일어난 아내는 목욕을 위해 따라나섰다. 가끔 술이나 안주를 가져가서 아내가 목욕하는 동안 남편과 보일러 기사는 술잔을 기울인다. 또 때로는 남편이 함께 탕으로 들어가 아내의 등을 밀어주기도 한다. 광업소 목욕탕은 가족탕 역할까지 한 셈이다.

늘 부탁할 수만은 없다 보니 보일러기사에게 말도 하지 않고 남편과 아내가 목욕탕에 들어가기도 했다. 퇴근을 늦게 한 광부가 영문도 모른 채 들어섰다가는 벌거벗은 여자와 맞닥뜨린 황당 사건도 종종 있었다. 알몸으로 있던 부녀자는 “이를 어째!”하고 비명까지 지르며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부녀자들이 단체로 갈 땐 며칠 전부터 관리인에게 목욕에 맞춰 물을 많이 끓여놓도록 부탁한다. 그 일은 관리인과 친한 부녀자가 맡아 담배, 수건, 비누, 막걸리, 두부지짐이나 김치 등을 선물로 가져갔다. 동네 부녀자들이 단체로 몰려가 씻다 보면 소문을 들은 남정네들이 일부러 찾아가선 몰랐던 척 시치미를 떼기도 한다.

부녀자들이 광부들의 목욕탕에 몰래 들어가 사용한 일이라든가, 관리인에게 부탁하여 부녀자 목욕날을 정하던 탄광촌의 목욕풍속, 이는 탄광이라는 단일 업종으로 형성된 탄광촌이기에 생겨난 문화이다. 광업소 목욕탕만이 유일한 공중목욕탕이던 시절, 광업소에서는 휴일이 되면 광부 가족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을 위해서 개방하기도 했다. 무료로 말이다. 어디 목욕탕뿐인가, 교통망이 원활하지 않던 때 광업소에서는 통근 버스로 학생들을 등하교까지 시켜주었다.

이는 향토기업과 지역주민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인정을 보여준 것이다. 광업소가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업의 이윤에 앞서 주민들의 생활과 함께 호흡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돌이켜 보면 광업소의 배려가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지역의 기업이 지역민을 위하고, 지역을 생각하는 정신이 있을 때 우리 사회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신용카드의 원조는 인감증
 
지갑마다 몇 개씩 들어 있는 신용카드는 도깨비 방망이다. 신용카드만 있으면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무엇이든 살 수 있다. 외국여행도 얼마든지 다닐 수 있다. 또 필요하면 현금대출까지 손쉽다. ‘돈 나와라! 뚝딱.’ 긁으면 되는 현대판 도깨비 방망이다.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도깨비 방망이보다 더 좋을지 모른다.
신용카드 같은 것이 태백탄광촌에서는 이미 1960년대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 태백탄광촌에서는 신용카드의 위력을 가진 인감증명서를 사용했다. 흔히 인감증이라고 줄여 불렀는데, 이는 신용카드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인감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쓰였다. 자기 자식 낳고는 ‘내 인감이야’라고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 자녀를 지칭하기를 ‘누구누구 인감이다.’할 정도였다. 또 ‘인감도장 잘못 찍어 패가망신했다.’라는 얘기가 있을 만큼 중요한 인감이다.

탄광촌에서 통용되는 인감증은 동사무소에 등록하는 인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광업소 신분증이다. 인감증은 신분증의 끝 모서리에 끈으로 광업소에다 등록한 도장을 연결해 놓았다. 인감증명서에는 회사의 사원번호라 할 수 있는 직종에 따른 고유한 번호가 쓰인 직번과 사진이 붙어 있다. 직번은 보통 6∼8자리로 처음 두 자리는 입사 년도, 나머지는 직종을 뜻한다. 직번만 보면 관리직, 기계직, 전기직, 생산직, 사무직 등의 직종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기계직에서 사무직, 생산직에서 관리직 등으로 직종이 바뀌면 직번도 바뀌었다.

인감증은 회사 내에서는 신분증으로, 밖에서는 지금의 신용카드 같은 기능을 했다. 태백탄광촌을 비롯해 삼척시 도계읍, 정선군 고한·사북·함백 탄광촌, 영월군 마차 탄광촌 등 석탄산업이 단일 업종으로 도시가 구성된 지역사회에서는 광부들에 대한 신뢰가 높았다. 따라서 인감증만 지니면 술, 음식, 옷, 쌀, 식료품, 영화까지 모든 게 해결됐다.

탄광촌의 인감증은 간편성으로 보면 신용카드보다 편리했고 위력 또한 컸다. 신용카드는 초과 사용으로 신용불량도 생겨나지만, 인감증을 사용하면 신용불량이 생겨나지 않았다. 사용 금액을 매달 급여에서 공제했으므로 급여 일정부분을 초과하여 생활이 곤란할 정도가 되면 광업소가 나서서 통제했다. 안정적인 소비가 이뤄지도록 관리되었으니 신용카드처럼 초과사용으로 빚 고민을 하는 부작용도 생기지 않았다.

신용카드로 몇천 원의 소액 지출을 하려 들면 대다수 업소가 카드사용 자체를 꺼린다. 이에 비해 탄광촌의 인감증은 지출 금액이 소액 단위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광업소의 인감증 거래소로 인정되기만 하면 월급날 자동공제에 의한 수금이 가능했으니 외상이 흔하던 당시로서 업소에서는 현찰과 같은 인감사용 반겼다. 광업소에서는 퇴직예정자라 하더라도 퇴직금 정산 때 완벽하게 결제 처리해주었으므로 인감증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