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8월이 되면 들과 산의 온갖 수목의 뿌리로는 맘껏 물기를 빨아올리고 검푸른 잎사귀는 한껏 뜨거운 태양을 받아들이며 이 세상은 활기로 충만합니다.
사람들은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라에서 싱그러운 계절의 자유와 풍요를 만끽합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 밑에 있던 그 옛날,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맘껏 공기를 호흡하고 거칠 것 없이 생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숨죽여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호흡하는 대지의 이 상쾌한 공기, 푸른 조국산하의 자율, 이 모든 것이 차디 찬 감옥에서, 혹은 남의 나라 망명의 땅 위에서 누군가 애타게 보고 싶어 했던, 살아서 반드시 보고 싶어 했던,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제 일신과 가족의 영화와 행복마저 포기하고도 결코 그 분들이 살아서 누릴 수 없었던 자유와 행복임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맘껏 일하고 노래하고 웃을 수 있는 행복은 먼 옛날 우리를 대신한 누군가가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통째로 포기한 희생의 대가입니다.
우리가 오늘 월드컵경기장에서 또 어디에서 목청껏 자랑스럽게 부르는 애국가는 누군가 감시의 눈을 피해 어두운 골방에서 또는 남의 나라 땅 낯선 골목과 산과 계곡의 전장에서 동지의 주검을 앞에 놓고 숨죽여 흐느끼며 부르던 노래입니다. 바다 건너 머나먼 타국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조국을 잃고 쫓겨 간 이 땅의 백성들이 조국이 그리워 울면서 부르던 노래입니다.
그리하여 8월 15일 해방을 기념하는 날, 길거리와 건물 옥상에 나부끼는 태극기는 깨끗한 하얀 바탕에 태극이 수놓아진 깨끗한 깃발이 아닙니다.
누군가 그것 하나 지키기 위행 전장의 포효 속에 타국의 강과 산을 건너 적진을 헤매다 어느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수도 없이 바느질로 꿰매고 또 꿰맨 순결한 누더기의 깃발이고 적의 감옥과 투쟁의 전선에서 고문과 고통 속에 압제와 굴욕에 몸부림치다 기어이 제 목숨과 맞바꾼 붉은 피로 얼룩진 깃발입니다.
올림픽스타디움에 광장의 사거리에 태극기가 아무리 많아도 누군가 가슴으로 그렸고 뜨거운 피와 눈물로 그렸던 단 한 장의 태극기보다 소중할 수 없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누구입니까?
지금 저마다의 일터에서 뿌듯하고 가정에서 행복한 우리는 옛날 조국을 잃고 헤매던 암울한 시절의 우리와 얼마나 다릅니까? 오늘의 우리는 그 시절의 누군가였고 옛날 그 시절의 누군가는 오늘의 우리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조국을 사랑하고 자신과 가족을 아끼고 남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먼 옛날의 그 누군가도 지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으므로. 그들도 우리처럼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이제 조국의 아름다운 국토와 푸른 하늘, 그 안에 살고 있는 국민을 지켜야 할 이 나라는 이제 그 분들의 유훈을 잘 지키고 남겨진 후손들을 끝까지 돌보고 보살펴서 조국을 사랑하여 희생된 사람들을 조국 또한 사랑한다는 것을 이 세상 모든 이가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조국 대한민국과 이 나라 안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