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지난 여름, 주택용 전기요금에만 적용되는 누진제에 대한 논란도 그만큼 뜨거웠다. 그러나 법원은 법적으로 누진제는 문제가 없다고 6일 판단했다. 다시 말해 공정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소송을 제기했던 소비자들은 항소한다는 입장이다.

한전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요금규정을 편의에 따라 개정해왔다. 이번 소송은 누진제 규정이 무효인지를 확인하고 지금까지 징수된 차액을 반환받고자 하는 소비자 17명이 2014년 8월 누진제가 부당하며 한국전력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익 반환소송에 대한 것이다.

한전이 주택용 전기요금에만 최대 11배 이상 차이가 나는 누진제를 적용하는 게 부당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지만 서울중앙지법은 한전의 손을 들어줬다. 이는 주택용 전기요금 약관이 공정성을 잃은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 재판부는 정부의 전기료 산정기준 고시를 보면 필요한 경우 누진제를 채택할 수 있도록 돼있다는 점도 판결의 이유로 들었지만 소비자들은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이번 판결로 소비자 8500명이 추가로 제기한 같은 내용의 소송에도 영향이 불가피해졌고 정부와 새누리당이 누진제 개선을 약속하며 당정이 꾸린 TF가 다음 달 개선안을 낼 예정인데, 1심 재판부의 판결 때문에 당정이 소극적인 개선안을 내놓는 건 아닌지 소비자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국민과 사회의 충분한 공감을 이끌어낼 만한 이슈들이 최근 진행 중인 국정감사에서 속속 밝혀지고 있어 거리감은 꽤 좁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소송에서 패소했지만 산업용 전기요금이 원가의 80% 수준으로 가정용 전기요금에 집중되는 요금 체계의 문제점이 지적됐고 폭염으로 냉방기기 사용량이 늘어났던 8월의 가정용 전기요금 납부액이 5월에 비해 3배 이상 늘어났다는 문제 제기들은 가정용에만 적용되는 징벌적 수준의 누진제 개편의 당위성을 말해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법원의 이번 판결은 전기요금 약관의 위법성 여부를 따지는 법리에 충실했던 판결로 비록 원고 즉 가정용 전기 소비자들이 패소했지만 전기요금 누진제의 문제점을 공론화시키고 개편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이제 공은 정부와 국회로 넘어 갔는데 법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국민 정서에 맞는 합리적인 수준의 개편안이 어떤 모습으로 제시될지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전기요금 누진제에 불복해 전국 법원에서 진행 중인 소송은 10건. 시민 8천여 명이 소송에 참가하고 있다.

한전은 알아야 한다. 협상은 제로섬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아무리 큰 우산을 펼친다 하더라도 쏟아지는 비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법도 민주주의는 절차이고 과정이다. 그걸 생략하고 결과만 불쑥 내미는 건 정당성이 없다. 국민의 정서법은 법의 기초에 있으며 법은 머무르면 머물수록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인 만큼, 법은 지키기 쉽고 명확해야 한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고도 했다. 법이 너무 복잡하고 번거로우면 아무도 지키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법망에 걸리는 건 힘없고 물정 모르는 잔챙이들뿐이다. 패공 유방이 가혹한 법으로 악명 높았던 진나라의 군대를 쳐부수고 수도 함양에 입성해 천하를 일거에 평화롭게 만든 것도 '약법 3장', 한자로 18자뿐이었다.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자 및 도적질한 자만 벌한다'.

서민에게 부담을 주는 징벌적 요금제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 고수 입장은 전기료 폭탄이 무서워 에어컨을 제대로 켜지 못하는 서민들의 고충을 알아야 한다.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누진제 완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정부는 '마이동풍'이니 서민 불만이 이 선선한 가을날에도 36도를 치솟는 수은주보다 더 열 올리는 형국이다. 서민 부담을 덜어줄 수 있도록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 구간과 요금 수준을 전면 재검토하는 게 올바른 정부 정책 방향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는 가치다원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관련된 의사결정구조 또한 급속도로 다변화되고 있다. 뒤떨어진 것을 알면서도 법대로 해야 하고 지배층(?)의 판단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우리 관습이다. 경직된 법과 제도 자체의 모순과 문제는 외면한 채, 또한 좁고 급한 자기중심의 결정을 수정하고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우리에겐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난국타개의 키워드는 '유연성'과 '창조적 자유'뿐이다.